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훙차오 공항 사건 (문단 편집) === 오오야마 사건 === 그러던 중 1937년 8월 9일 오후 5시,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 서부파견대 대장 오오야마 이사오(大山勇夫) 중위가 훙차오 공항 인근의 군사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일등수병 사이토 요조(斎藤與蔵)에게 차를 운전하게 하여 훙차오 공항으로의 난입을 시도했다. 이에 중국군 보안대 위병들이 정차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오야마는 위병들의 제지를 무시하고 권총을 발사하여 중국군 보안대원 1명을 살해했다. 이에 중국군 보안대가 발포하여 오오야마 중위와 사이토를 사살했다. 일본군은 이것이 송호정전협정 위반이라면서 사건의 공동조사와 중국군 보안대 철수를 요구했다. || [[파일:사이토수병.jpg]] || [[파일:오오야마중위.jpg]] || || 사이토 일등수병 || 오오야마 중위 || 하지만 이날 경호 경비총사령 [[장즈중]]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일본군이 상하이 병력을 증원시키고 있다. 기존의 해군육전대 5000명에 재향군인 3000명과, 지원병 3500명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일본 해군 9척이 장강 상류를 경유, 상하이에 도착하였는데 해군육전대 3000명을 싣고 왔다." 또한 일본군 3함대가 13척에서 29척으로 증강되었고 2함대까지 사세보에서 상하이로 오고 있다는 정보 역시 들어왔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였으나 장제스는 이미 상하이에서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8월 11일 장즈중에게 공동조계지 반경 20킬로미터 지점을 비무장지대로 둔다는 송호정전협정을 무시하고 일본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상하이의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예하부대를 상하이 부근으로 추진배치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장즈중은 8월 11일 심야, 과거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활약한 바가 있는 최고 정예부대인 87사단과 88사단을 비롯한 예하 부대를 상하이 교외에 배치하였다. 마침 상하이는 1935년 겨울부터 진지공사가 행해져 용화, 홍차오, 진여, 갑북, 강만, 대장 등 상하이를 멀리서 감싸면서 튼튼한 방어진지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 방어진지는 완전히 지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상하이 전투 발생 이후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